안녕 이번에 다룰 주제는
바로 한국 떡볶이 시장의 역사와 성장
브랜드 떡볶이들의 전략에 관한 이야기임
한국 떡볶이 시장이 어떻게 태동하여
오늘날 이토록 성장해왔는지
2000년대 이후로 등장한 떡볶이 브랜드들이
어떻게 시장을 개척하고 자리잡았는지
종합적으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함
[목차]
[1] 한국 떡볶이 시장의 태동과 성장
[2] 각 떡볶이 프랜차이즈들의 전략
뭐 이렇게 2개 파트로 정리할텐데
그냥 이 새끼가 이 순서로대로 쓰는구나
그렇게만 이해하시면 됨
* 그리고 너무 길다는 사람들은
맨 마지막에 요약해놓은거 있으니
그거 보시길 권함
한국 떡볶이 시장의
태동과 성장
1953년 이전엔 간장떡볶이가 대세
1953년 서울 신당동에서 탄생한
현대식 고추장 떡볶이
뭐 아는 사람들도 많을테지만
사실 우리네 전통 떡볶이는
궁중 떡볶이로 불리는 간장 떡볶이임
궁중음식의 하나로 주재료인 가래떡에 쇠고기
박오가리, 숙주, 미나리, 표고, 당근, 양파 등
여러 가지 채소들을 한데 섞어
간장양념으로 간을 하여 볶은 음식으로
고추장이 아닌 간장으로 간을 한 게 특징임
궁중떡볶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00년대 말 경북 상주지방의 조리서인
시의전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흰떡과 등심살, 참기름, 간장, 파
석이버섯, 잣, 깨소금 등 이용해 만들었으며
이땐 떡찜, 떡잡채, 떡전골로 불렸다고함
궁중 (간장) 떡볶이의 경우 왕비를 다수 배출하고
(EX) 정희왕후, 정현왕후, 문정왕후 등등)
조선의 명문가로 세도를 누렸던
파평 윤씨가문의 별식이였다고 알려짐
당시 파평 윤씨가문의 간장이 맛있다
소문이 자자했다 알려지는데
그 간장으로 한 떡찜이 대궐에 진상되고
궁중 떡볶이가 유래했다고 알려짐
궁중 (간장) 떡볶이는 조선조는 물론이고
일제시대까지도 소수 계층만 먹을 수 있는
별식이였으며 민초들에겐 쉽게 접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였다고 알려짐
오늘날 서민음식이란 떡볶이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나름 재밌는 부분임
1953년 탄생한
현대식 (즉석) 고추장 떡볶이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시작
고추장 양념을 곁들인 떡볶이의 기원에 대해선
훨씬 그 이전이란 견해들도 있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상황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형태의
현대식 고추장 떡볶이 시초는
바로 1953년 서울 신당동으로 많이봄
전쟁 직후였던 1953년 가족들과
중국집을 찾은 마복림 할머니는
짜장면 그릇에 우연히 가래떡을 빠뜨렸고
짜장의 재료인 춘장과 고추장을 풀어 넣은
고추장 떡볶이를 개발하게 되었다고 알려짐
그 후 고추장 떡볶이는 소문나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대성공했으며
이러한 마복림떡볶이의 인기에
주변 가게들이 너도 나도 따라하게 되면서
그 일대에 떡볶이 집들이 들어서고
이른바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형성하게됨
그게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 타운임
신당동 떡볶이의 대모 마복림 할머니는
1996년 태양초 고추장 광고에 출연하면서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라고 말했는데
이게 당시 유행어였다고 알려짐
현대식 고추장 떡볶이의 원조를 모델로 기용해
고추장의 정통 = 해찬들 태양초 고추장 이 점을 어필
광고효과 ㅆㅅㅌㅊ 였다고 알려짐
그래서 2011년 12월 마복림 할머니께서
향년 91세로 별세하셨을 때
당시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보도함
현대식 고추장 떡볶이를 창시했고
그러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니
주요뉴스로 보도헸다고 볼 수 있음
실제로 마복림 할머니가 별세하셨을 때
1980 (특히 중후반생)~90년대생들은
이 분이 누군지 잘 몰랐단 반응들 이였고
19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애도했다고 알려짐
나도 이 분 잘몰랐음
그러다 돌아가셨을 때 실검보고
뉴스보고서야 알았지
마복림 할머니 포함
3대 떡볶이 할머니
1953년 마복림 할머니가
현대식 (즉석) 고추장 떡볶이를 개발한 이후
마복림 할머니를 포함해
3대 떡볶이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대표적인게 서울 통인시장 기름 떡볶이와
대구 신천시장의 마약 떡볶이라고함
특히 통인시장 기름 떡볶이는
그 유명세가 상당해서
2014년 2월 당시 방한한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이 직접 방문해
시식한 걸로도 한동안 유명해짐
이 부분은 이명박 -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떡볶이 세계화와 연관이 있음
뭐 뒤에 가서 또 언급하기로 하고
하지만 한국 떡볶이 산업과 시장이
오늘날과 같이 성장한 배경엔
단순히 마복림 할머니표 떡볶이가 맛있어서
유행하고 그런 것만은 아님
정책적 사회적 변동에 따른 부분도 적지않음
한국 떡볶이 시장 성장
그 정책적 배경
1] 혼분식 장려운동 (밀떡볶이)
2] 1976년 미곡자급률 100% 돌파
쌀이 남아도는 시대 (쌀떡볶이)
한국 떡볶이 산업과 시장이 발달한데는
정책적 요인도 크다는 평가인데
단적인 사례가 바로 196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된 혼분식 장려운동임
만성적인 쌀 부족에 시달리다보니
밀가루 소비를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그 결과 한국인의 밀가루 소비량이 폭발함
라면이나 특히 밀떡볶이 등이 대유행하게됨
하지만 1970년대말부턴 사정이 달라짐
불과 10년전만 해도 쌀부족이 극심했는데
1972년 통일벼 전국 확대 보급등으로
미곡 자급률은 1976년 100.5%로
건국이래 사상 최초로 100%를 넘겼고
1977년 103.4%, 1978년 103.8%를 기록함
즉 쌀이 남아도는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
이에 당시 정부는 1977년
쌀 부족등을 이유로 14년간 금지해온
쌀막걸리 제조를 전면 허용하고
쌀 소비를 독려하기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쌀 가공식품 생산을
대대적으로 권장하게 되는데
이때부턴 쌀 떡볶이가 유행하기 시작함
이때부터 탕수육 부먹 VS 찍먹과 함께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음식관련 고민인
밀떡 VS 쌀떡 (?) 그 서막이 오르기 시작하는데
뭐 지금이야 사실 호불호가 걍 비슷비슷하지만
과거엔 세대별로 상당히 갈렸다고함
1960년 ~1970년대 초반 밀떡이 유행하던 시기
그걸 먹고 자란 세대들은 밀떡을 선호하고
1970년대 말이후 쌀떡이 대량 생산되던 시기
그걸 먹고 자란 세대들은 쌀떡을 선호하고
물론 그런거 X까 걍 둘다 선호하는 부류들도 많고
1960~1970년대 고교야구
1980년대 이후 프로야구 등
한국 야구붐에 따른
떡볶이 산업의 급격한 성장
(EX) 신당동 떡볶이 대호황)
그리고 한국 떡볶이 산업성장에
불을 지른게 바로 야구인데
1960~1970년대는 고교야구,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이후
한국 떡볶이 시장이 급성장함
이유는 바로 야구팬들의 유입때문
당시 야구팬들의 성지로 꼽히던 동대문 야구장은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저 사진과 같이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다고 알려지는데
저 양반들이 경기끝나고나서 상당수 찾는 곳이
바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였다고함
뭐 장충동 족발도 이때 호황을 맞이했고
그리고 떡볶이로 대박나서 떼돈벌고
건물 올렸단 (?) 사례가 속출했다고 알려짐
물론 어디까지나 극 초기때 상황임 ㅋㅋ
그러다보니 야구장 주변으로 떡볶이 집들이
대거 들어서게되고 노점까지 등장하는 등
이때부터 떡볶이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
서울은 물론이고 지역 야구구장마다
분식집들이 대거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함
1970~1980년대 당시 젊은층
(1950~60년대생들)들이
즐기던 당시의 분식문화
1970년대 들어선 이른바 분식집 DJ라고 해서
라디오 DJ처럼 사연도 읽어주고
신청곡도 즉석에서 틀어주고 뭐 그런 시스템이
대유행했다고 알려지는데
뭐 지금은 급식이나 학식들이 홍대나 강남에서 많이 놀지만
지금은 거의 종로에 집결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래서 종로쪽에 분식센터 (지금의 분식집)들이
그런 급식과 학식들을 겨냥해 장사했는데
특히 여학생들 사이에서 분식점 DJ 인기가
대단해서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급이였다고함
그래서 서로 인기DJ를 데리고 가려
다방이나 빵집 분식집 주인들끼리
박 터지게 싸웠다고 알려짐 ㅋㅋ
그리고 당시 급식들이나 학식들의
연애장소로도 유명하다고 알려짐
저기서 단체미팅이나 소개팅을 많이했다고함
그러다보니 지금 50대이상 세대들중엔
저 빵집이나 분식집에서 사귀게되어
연애나 결혼을 했단 사례가 허다했다고함
1970년대생들 X세대같은 경우엔
초반생과 후반생들이 묘하게 세대차가 갈리는데
초반생들까진 이런 빵집이나 분식집 DJ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추억도 있는 반면
70년대 중후반생이나 80년생등은 알긴 아는데
우리 문화는 아니다 딱 선긋기(?) 시전함
아무래도 90년대부턴 이러한 시스템이
점점 사라지다보니 그런 듯함
떡볶이 대중화의 첨병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학교 앞 분식집의 유행
어마어마한 인구빨을 가진
60~70년대생들 영향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떡볶이는
동네 골목상권 특히 학교 앞에까지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함
뭐 그 이전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이 형성됨
그도 그런것이 바로 어마어마한 인구빨인
1960~1970년대생들 존재때문인데
이 양반들이 태어나도 존나게 태어남
이게 훗날 연금이나 현행 사회복지수준을
유지하는게 불가능할거라고 보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기도 한데
이렇듯 1960~70년대생들이
학령인구로 들어서면서 그들을 겨냥한
학교앞 분식점이 대거 들어서게됨
아마 이 글 읽는 사람들도 많이 먹었을테지만
컵 떡볶이도 이 시기에 나왔다고 알려짐
간편하게 휴대하면서 먹을 수 있게 만든
컵떡볶이는 떡볶이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움
1990년대에도 전성기를 누린
학교 앞 분식시장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
이러한 1970~80년대
학교 앞 분식집의 전성기는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데
비록 밀레니얼 세대 (81~96년생)들은
전 세대인 586이나 X세대과 비교하면
학령인구 규모는 대폭 줄어들긴 했지만
소비력은 크게 증대됐다는 평가를 받음
전 세대와 비교, 인구는 줄지만
1980년대 말 경제호황기
초중고교생 용돈규모가 대폭 상승
그에 따라 씀씀이도 커짐
뭐 지겹게 강조한 부분이지만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경제호황이나 소득수준의 향상 등 영향도 있고
80년대 초반 어린이, 급식들이 받는 용돈이랑
80년대 후반 혹은 90년대 초반
어린이, 급식들이 받는 용돈차이가 크다함
1989년 KBS 뉴스에 따르면 89년 당시
초등학생 기준 하루 용돈이 110원
한달평균이 3400원이라 조사됐는데
이는 80년대 초반과 비교했을때
대폭 상승된 수치라고함
84년과 비교했을 때 2000원 미만은 줄어들고
5000원 이상은 대폭 증가하게됨
물론 물가상승률이나 화폐가치 등을
따져봐야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초중고교생의 소비력이 이때부터
급속도로 높아졌다고 알려짐
(그래서 70년대 초반생과 후반생들이
묘하게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점이라고함)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선
이러한 흐름이 더욱 더 가속화되는데
특히 여성의 경제활동인구 및 참가율이
크게 증가하고 맞벌이가 점차 확산되면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용돈주고
그냥 니가 알아서 사먹고 해라
이러한 분위기가 확산됐다고함
그러다보니 학교앞 분식집뿐만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이나 초중고교생을 겨냥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되는데
오죽하면 당시 지상파 메인뉴스에서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한테
너무 용돈 펑펑준다고 사회문제라며
비판하는 보도를 쏟아냈다함
아무튼 이러한 영향으로
최대호황을 맞이한
학교 앞 문방구 & 분식집
이러한 영향으로 1990년대 들어
학교 앞 문방구나 특히 분식집이
최대 호황을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 당시 어린세대였던 사람들이라면
길에 다니면서 손에 들고다녔을거라 생각됨
(난 피카츄 존나 먹었던게 기억남
그러다 배탈나서 개고생했던 기억도 ...)
그러다보니 저런 코묻은 돈(?)을 노리고
남편은 문방구, 아내는 분식집 이렇게
나란히 운영하는 사례가 허다했다고함
심지어 그래서 떼돈 번 사례도 은근 많다함
오죽하면 방송에서 학교앞 문방구나 분식집을
유망 창업 업종이라고 소개하곤 했다함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초중고교 앞 상권이 몰락
기존 분식집들은 대거 문을 닫거나
브랜드 떡볶이 전문점으로 변모
하지만 다들 잘 알겠지만 오늘날
학교 앞 문방구나 분식집은
거의 몰락했단 평가를 받고 있는데
경제호황기 막바지인 1995년
건국이래 최대 규모인 26300곳에 이르던
문방구가 2015년도엔 11700곳으로
해마다 1000여곳이 문을 닫아버림
참고로 저게 5년전 기준이니 지금은 더하겠지?
학교 앞 분식집도 마찬가지라 문을 닫거나
대거 브랜드 떡볶이 전문점으로 바뀌게됨
그러다보니 분식 가격자체가 대폭 상승함
그래서 2000년대 이후로 떡볶이 시장이
학교 앞 영세분식집이란 플랫폼에서
브랜드 떡볶이 체제로 변모했단 평가임
그리고 타깃연령대도 확 올라감
2000년대 이후
기존 영세분식점은 몰락
한국 떡볶이 시장이
프랜차이즈 시대로 재편
그렇게 2000년 대이후로
한국 떡볶이 시장은 오늘날과 같이
브랜드 떡볶이 시장으로 재편됨
1999년 대구에서 런칭한 신전을 시작으로
2002년 프랜차이즈를 시작한 아딸
(지금은 감탄 떡볶이랑 나뉨)과 동대문 엽기떡볶이
그리고 2007년 런칭한 죠스 떡볶이와
떡볶이 (한식) 세계화가 강조되던
2010년 런칭한 국대 떡볶이등
떡볶이 프랜차이즈 체제로 들어서게 됨
2009년 우파정권이
강력추진한 한식 세계화
대표품목중 하나였던 떡볶이
고향만두의 몰락과 비비고 만두의 급성장을 알아보자
오늘 다룰 주제는 한국 냉동만두시장을 30년간 장악한 해태 고향만두의 그 성장과 몰락 2014년 이후 한국 냉동만두시장을 장악한 CJ 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에 관한 이야기임 한국 냉동만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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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보글에서 다룬 부분이지만
2000년대 이후 집권한 우파 정부는
한식 세계화를 강조하고 강력하게 추진함
특히나 2009년이 한식 세계화 원년으로
이때부터 박근혜 정부에까지 이어짐
흔히 여기까진 다들 아는데
몇몇 사람들이 한식 세계화를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인 김윤옥 여사가 단독으로
구상하고 주도한줄 아는데 그건 ㄴㄴ임
이명박 대통령이 구상한 걸
영부인이 대리해서 권한을 위임받는데
김윤옥 여사가 요리실력이 좋은 것도 있고
역대 영부인들은 저마다 대표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추진한 정책들이 있음
그건 어디까지나 남편을 대리해서 한거임
사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나
대통령 후보때부터 강조한게
바로 식품산업 진흥이였고
그 일환 중 하나가 한식 세계화였음
(2002년 디즈니랜드 유치하려고 할때부터
한식 세계화 이야기가 꼭 나왔었음)
그래서 정권교체하고 정부개편할 때
기존 농림부가 식품업무까지 전담하도록
바뀌게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데
(저땐 해양부까지 합쳐 농림수산식품부고
박근혜 정부땐 해양수산부가 부활해서 바뀜)
이게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그렇고
기업인 출신 대통령들은 모든 분야를
경제적 산업적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고
경제효과를 창출케하는데 역점을 둠
이명박 대통령은 식품 = 차세대 성장동력 중 하나
이렇게 본거임
개인적으로 기업인 출신 지도자를
선호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건 향후 성장동력
경제성장에 관한 문제니 거기에 빠삭해야하니까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선정한
한식 세계화 4대 대표음식
떡볶이/김치/비빔밥/막걸리
떡볶이 세계화 흐름에 따라
지원이나 투자가 대폭 증가하고
떡볶이 시장이 커짐
아무튼 2009년 당시 이명박 정부는
한식 세계화 4대 대표품목을 선정하는데
김치, 비빔밥, 떡볶이, 막걸이 (전통술)임
여기에 관련 법령도 제정하고 예산도 쏟아붓고
식품관련 기업들로 하여금
이 4대 메뉴관련 사업에 투자를 장려함
그러다보니 이때부터 한국 떡볶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대규모로 자본이 흘러들면서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단 평가임
떡볶이에 대한 일부 친문진영의 공격
국대 떡볶이 관련 마녀사냥까지 겹쳐
이에 대해 우파는 강하게 반발
개인적으로 음식 가지고 왜 이런지 모르겠지만
그러다 정권이 교체되고 친문성향으로 유명한
황교익 칼럼니스트가 떡볶이는 몸에 안좋고 맛없다
이건 MB등 우파들이 국민들 현혹시킨거다
이런 논리를 내세우기 시작함
근데 이 사람만 이런게 아니라 친문 혹은 좌파로
유명한 사람들도 이 주장에 동조함
그러다보니 당연히 조선일보등은
이를 떡볶이 비하라며 거세게 공격함
일부 우파 언론에선 아예 이를 조롱하듯이
떡볶이 회식까지 했다고 알려짐
이제까지 한국 떡볶이 시장의
태동과 성장에 대해 알아봤다면
두번째 파트부턴 우리가 즐겨찾는
브랜드 떡볶이들의 역사와 전략에 대해
심도깊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함
각 브랜드 떡볶이들의
역사와 전략
대구를 거점으로 성장한 신전
2014년 이후 서울진출
아딸 VS 감탄 분열 이후
죠스 떡볶이를 추월하며
떡볶이 시장 신흥 강자로 급부상
신전 떡볶이는 1999년 대구 북구 칠성동에서
1호점을 오픈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TK 지역에서 급성장한 체인임
그러다 2014년 서울진출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음
2018년 기준 매출 364억 영업이익 49억으로
죠스 떡볶이를 제끼는 파란을 일으킴
TK 지역에서 주목받고있다는
신전 창업주 하성호 대표
신전푸드시스 (신전떡볶이) 창업주
하성호 대표는 77년생으로 44살임
갓 군대전역하고 23살이던 1999년
대구 북구 칠성동에서 직접 배달하고
아르바이트생 한 명과 둘이 고군분투하며
신전떡볶이를 키웠는데
그렇게 입소문이 나
2003년 대구 동성로에 2호점을 내고
이게 매출이 폭발하면서 TK지역을 기반으로
급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신전같은 경우는 대구에 연고가 있다보니
각별히 신경쓰는걸로 유명하다함
대구지역 초등학교 1곳, 중학교 1곳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으며
대구나 특히 대구북구에 무슨일이 터지면
기부와 지원을 하는걸로 유명한데
그러다보니 사업이외에 다른 꿈(?)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상황이라고함
하성호 대표에 눈독들이는
일부 TK 정치권과 언론
그러다보니 나이도 상대적으로 젊고
신전이란 브랜드 인지도에
특히나 요즘 젊은 기업인이란 개념이
정치권에 관심을 한 몸에 받다보니
TK 정치권에서 관심이 나름 상당하다고함
지역언론에서도 그래서 주시하는 편이고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40대 기업인이
대선후보니 뭐니 거론하는 바람에
40대 기업인들은 다 거론되는 편임 ㅋㅋ)
매운 떡볶이 마니아들에 집중
그러다보니 대구에 비해
매운맛이 약한 서울지역의 경우
진출 초반엔 상당히 고전
신전떡볶이의 타깃과 전략은 명확했음
초반 매운 떡볶이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에 집중해
그들을 겨냥하는 조리법과 메뉴를 선보임
물론 비용절감을 위해 광고는 1도 안했다고함
그리고 TK를 비롯해 영남지역 사람들 자체가
매운맛에 워낙 단련되고 강한 (?) 사람들임
그런데 문젠 2014년 서울진출엔
초반 부진을 면치못해는데
바로 서울사람들이 먹기엔
매워도 너무 매웠다는 사실
그래서 원래 매운맛만 2가지였는데
서울진출 후 서울고객들 취향때문에
순한맛을 추가했는데 영남쪽은 매운맛이
서울은 순한맛이 초강세라고함
서울진출 초반 신전 내부에서도
서울사람들 매운 거 이렇게 못먹나
상당히 놀랐다고함
세계 최초의 떡볶이 박물관
대구 북구에 위치한 신전 뮤지엄
그러다보니 올해 초
신전떡볶이 본사가 위치한 대구북구에
세계 최초 떡복이 박물관을 오픈함
(진짜 대구 북구에 대한 정이 각별한듯함)
바로 신전 뮤지엄이란 곳인데
오픈 첫날 보다시피 저렇게 인파가 몰림
이걸 런칭한 의도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랜드마크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경제효과를 창출하기위한 것으로 판단됨
그런데 문제는 준비부족으로
개관 하루만에 문닫고 그러면서
당시 주요언론들에게 존나게 까임
게다가 그 직후 코로나로 인해
대구가 초토화되면서 이 신전뮤지엄도
나름 타격을 입었다고 알려짐
(타이밍이 정말 X같긴함)
서울 등 수도권을 거점으로
떡볶이 프랜차이즈시대를 연 아딸
한국의 대표 브랜드 떡볶이로 군림
아버지와 딸의 떡볶이의 줄임말인
아딸은 파주 미군기지에서 물품을 배달하던
이영석 (현 아딸 대표의 아버지) 옹이
우연한 기회로 미군부대에서 튀김기술을 전수받아
1972년 문산튀김집이란 가게를 차렸는데
당시 파주는 물론이고 경기북부지역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하던 가게였다고함
그러다보니 아딸이 다른 브랜드보다
튀김 하나만큼은 초창기 압도했단 평가였다함
그러던 중 이영석 옹의 딸인 이현경 대표와
사위인 이경수 대표가
2000년 서울 금호동에 자유시간이란
8평짜리 분식집을 오픈하면서
이영석 옹이 문산에서 금호동까지
매일 4시간씩 왕복하며 딸과 사위를 도왔다고함
참고로 이영석 옹은 2004년 작고하심
미디어가 키운 아딸
이렇게 평범한 8평짜리 분식집이
전국적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생기니
바로 MBC 대표 예능인 일요일 일요일 밤에
2대 가업을 잇는 장인과 딸 부부라고
방송을 탔다고함
근데 이 방송이 나가자마자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빵 터짐
과거 이경수, 이현경 대표가 여성동아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아침부터 줄선 사람들때문에
끼니까지 거를 정도로 정신없었고
문의전화가 쇄도해서 전화기 코드를 뽑고
영업을 할 정도였다였으며 오죽하면
MBC까지도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난리였다함
그러다 당시 신촌에서 식당을 하던 고모가
이왕 할꺼면 큰물, 대학가 상권으로 와서 해서
들어가게 된게 바로 이대 (+신촌) 상권이라고함
이대 등 신촌 대학가 상권을 겨냥
공격적인 성장전략 구사
특히 여성고객을 타깃으로 공략
뭐 지금이야 이대 상권 다 죽었다고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름 팔팔하게 (?) 살아있을 때라
그렇게 2002년 4월 이화여대 입구에
아딸 1호점이 오픈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됨
60평의 반지하였던 매장은 처음엔
아니 누가 떡볶이랑 튀김 먹으러
반지하까지 오냐 미쳤단 소리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대성공함
특히나 떡볶이는 여자들의 소울푸드라고해
여성고객들이 즐겨먹는데
당시 아딸 이대점은 이대생들에게
핫플레이스였다고 알려짐
입지자체가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지
분식체인들이 여대, 여중여고 앞에
입점을 선호하는게 이러한 맥락임
분식의 주 소비층이 여성이고
맛만 괜찮으면 망하지는 않거든
(거기다 훈남 알바 두면 걍 매출 팍 오르고)
비슷한 시기 아딸의 대표메뉴인
허브 탕수육이 선을 보이는데
이게 아딸 매출을 거의 캐리했다함
2002년 5월부턴 프랜차이즈를 본격화
초창기엔 대폭망
메뉴와 입지의 중요성
그런데 아딸이 마냥 잘나간게 아님
등촌동에 2호점을 오픈했는데 망함
망해도 그냥 망한게 아니라 개폭망
심지어 장사가 너무 안돼 배달까지 했는데
오히려 이경수 대표가 다치기까지 했다함
여기서 폭망한 이유는 간단함
첫번째 이유는 메뉴가 너무 많았다고함
아무거나 다 잘팔리니까 그럴줄 알고
메뉴를 늘려놨는데 오히려 비용만 늘고
그닥 매출엔 큰 영향이 없었다는 점
이래서 잘나가는 식당은
메뉴 2~3개만 잡고간다는 말이 있나봄
(메뉴판에 이것저것 많을 수록
맛집은 아니구나 이렇게들 보니까 ㅋㅋ)
두번째는 바로 입지문제였는데
반지하였던 1호점과 달리
2호점은 2층이였는데
문젠 떡볶이를 사먹으러오는 고객들이
내려가는건 감수할 수 있어도
올라가는건 존나 힘들어했단 사실 ㅋㅋ
원래 음식점이 2층에 입점하려면
진짜 맛집이거나 브랜드 매장이면 가능
하지만 단순 분식점들은 절대 ㄴㄴ
그래서 이때부터 아딸이나 브랜드 떡볶이들은
철저하게 1층 위주로 가맹점을 냄
아무튼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2000년대 중반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함
이른바 착한 기업으로
이미지 메이킹 전략 구사
흔히 착한 '척' 이라도 하란 말이 있음
그게 진실이든 위선이든
가급적 선한 이미지를 내세우는게 좋음
그런 차원에서 아딸이 나름 영리하게
기업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구사함
바로 착한 기업 마케팅인데
당시 이경수 대표가 전면적으로 언론에 나서
아딸은 착한 기업이다 우린 착한 경영이다
자서전 제목도 착한 성공임
이러한 전략은 10년간 잘먹힘
그러다보니 브랜드 평판도 좋았는데
문젠 이게 치명적 단점이 있음
바로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는 순간
이미지가 한순간에 추락한다는 점임
사실 우리가 개개인도 그러잖음
원래 개차반같은 놈이 개지랄을 떨면
그냥 그래 저 새끼 원래 저러지 넘기지만
이미지 존나 좋은 사람이 개지랄 조금 떨면
와 ㅅㅂ 존나 정떨어진다 이러는데
2015년 당시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랜차이즈 업체를 대대적으로 수사할 때
(워낙 본사 갑질 심하다고 언론에서 두들겼고)
음식 재료 납품업자에게는 64억 원을 받고
그 대가로 전국의 아딸 가맹점에
순대와 떡볶이떡, 튀김가루 등
식자재 500억원 규모를 납품했고
인테리어 업자에게서도 4억 원을 받고
가맹점 인테리어 공사를 전담케했다며
이를 배임수재, 횡령혐의로 구속함
당시 아딸은 이에 대해 장문의
해명과 사과문을 내고 그럼
뭐 아딸도 나름의 입장이 있을테니
이 사안에 대해선 읽는 사람들이
각자 판단하시길 바람 난 노코멘트함
하지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착한 이미지로 포장하는건 좋은데
본인이 직접 어필하는건 삼가야한다는 점
그리고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한다는 점
그렇게 쌓인 착한 이미지는
작은 흠집과 실수에도 산산조각이 날 우려가 큼
사실 다른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그냥 한번 두들겨맞고 끝난 일인데
뭐 두들겨맞고 매장까지 당하는 셈이니까
아딸 창업주 부부의 이혼소송
최대주주인 남편 VS
아딸 상표권 등록권자인 부인
아딸 VS 감탄으로 분열
엎친데 덮친격으로 얼마 지나지않아
창업주 부부가 이혼소송에 돌입함
그러면서 갈등이 증폭되는데
이혼과 함께 상표권 소송에 들어간거임
결국 상표권 소송에서 부인이 이겨서
기존 상당수 아딸 떡볶이 점포들은
아딸이란 명칭은 못쓰게 됨
결국 감탄 떡볶이로 바뀌게 됨
이런저런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겹치면서
아딸 즉 지금의 감탄떡볶이는 하락세로 접어듬
감탄떡볶이로 접어들고나선
매출액도 (2018년 기준) 210억원으로
현재 빅3 (신전 VS 죠스 VS 국대)에도 밀림
아무래도 일련의 사건들에
창업주 부부 갈등으로 갈라지고
경쟁업체들이 치고 올라온 결과라고 판단됨
술안주에서 힌트를 얻어
1020 여성들을 타깃으로 공략한
동대문 엽기떡볶이
동대문 엽기떡볶이 창업주 금주영 대표는
1990년대 잘나가던 동대문 의류상이었음
동대문 한 의류회사에서 MD로 일하다
의류도매사업에 뛰어들었는데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남
한창 재기를 위해 발버둥치는데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맵부심이였다고함
이게 무슨 개소리냐 하면
당시 본인을 비롯 동대문 시장을 찾는
여성들이 매운 음식을 존나 좋아한다는 점
특히 술안주로 남자들도 진입장벽이 있다는
매운 불닭발을 즐겨먹는다는 점을 캐치해
동대문 중앙시장 안 13㎡ 남짓한 공간에서
불닭발 사업을 시작했다고함
원래는 불닭발이 메인이고
엽떡은 사이드였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2003년 기준으로 엽떡이 매출 60%를 차지함
그러다보니 당연히 엽떡에 집중하기 시작함
동대문엽기떡볶이의 핵심타깃은
바로 1020 여성들이였는데
이유는 매운음식을 존나 좋아한다는 점
(나같은 초딩 입맛은 존나 무서움)
그래서 가맹점을 낼 때도
1020 여성들이 밀집한 지역에 입점시키고
마케팅도 그들에 집중해서 펼침
그 결과 여중여고생들, 여대생들이
핵심고객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함
상대적으로 가격이 센 편이긴 하지만
지갑이 얇은 10대 여학생들의 경우엔
3~4인분을 시켜 돈을 나눠낸다고 함
그러다보니 남성들 입장에선
저걸 좋다고 먹는 혈육메이트
여사친, 여친을 보면서 이해불가를 외침
비싸기만 하고 존나 매운걸
도대체 왜 먹는거냐고
그래서 한때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자들 가장 이해 안가는 부분 중 하나로
엽떡 소비를 꼽기도 했었음
물론 케바케라 남자들중에도
엽떡 존나 좋아하는 부류들도 있긴한데
전반적으로 여성고객이 압도적이니까 ㅇㅇ
2030세대를 집중공략한 죠스떡볶이
배달이나 모바일 기프티콘에 적극적
2007년 고려대점을 1호점으로
문을 연 죠스떡볶이의 경우
당시 선두주자였던 아딸과 차별화를 꾀하는데
바로 2030세대를 집중 공략한다는 점
사실 아딸같은 경우는 이대점을 시작으로
빵 뜨긴했지만 그후 확장을 하면서
가족 단위 고객들을 겨냥하는데 초점을 둔 반면
죠스떡볶이는 철저하게 2030세대에 집중하는데
가맹점주도 타 브랜드들과 비교했을 때
그 연령대가 상당히 어린 편으로
가맹점주의 60~65%가 2030세대임
그러다보니 타 브랜드들보다
젊은 분위기가 강한 편임
(물론 국대가 들어서면서 그것도 옛 이야기지만)
죠스떡볶이가 머리를 잘쓴 게
배달에 힘을 많이 씀
사실 아딸같은 경우는 배달을 안함
그 이유에 대해 아딸은
배달로 인해 추가인건비가 발생하고
분식맛의 관리가 힘들어지며
객단가가 낮은 분식류의 경우
배달이 그렇게 큰 효용이 없다 판단하는데
죠스떡볶이는 ㄴㄴ 배달로 인한
분식맛의 저하는 재료와 포장에 따라
충분히 보완이 가능하며
분식류같은 경우 젊은세대는 와서 먹거나
번거롭게 테이크아웃해가는 것보다
집에서 편하게 배달시켜먹는게 좋다
그래서 배달에 힘을 존나씀
그 결과 편의성이 증대되는데
사실 여기엔 엇갈리는 평가도 존재하는데
배달을 하다보니 가서 먹는 것보단
확실히 맛이 떨어진다는건데
뭐 이건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고
재밌는 점은 그렇게 엄격하게
배달금지를 고수했던 아딸이
감탄떡볶이로 사명이 바뀌고 나면서부턴
최근들어 배달시장에 진출했다는 점인데
특히나 2020년 우한 코로나가 강타하고
배달수요가 급증한 결과라고 보여짐
그리고 죠스떡볶이는 2010년대 이후
스마트폰 혁명이 도래하면서
모바일 기프티콘이나 상품권에도
힘을 잔뜩 주게되는데
이 또한 아딸과 차별화를 둔 전략임
각종 협찬과 이벤트를 통해
모바일 기프티콘을 뿌리게됨
사실 죠스떡볶이 성공배경에
이 모바일 기프티콘, 상품권의 존재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며 타 브랜드들은 향후
이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함
그리고 많이들 알겠지만
죠스떡볶이의 경우 길이가
타 사 떡볶이들과 비교할 때 짧음
원래는 죠스 떡볶이 길이도 길었다함
그런데 주 고객층인 2030 여성들이 먹을 때
애로점이 떡볶이 떡 길이가 길면
립스틱에 떡볶이 양념이 묻는 등
불편함이 컸다고 알려짐
그래서 그걸 보고 이건 아니다싶어
3.5cm 한입에 쏙 들어가는 길이로 변경함
그러다보니 여성고객들이 먹기 편해지고
매출이 급격히 상승했다고함
그리고 매운맛을 좋아하는
여성고객들 취향에 맞추기위해 노력함
이렇게 점점 더 매워지는
떡볶이에 대한 일각의 불만
그런데 신전, 동대문 엽떡, 죠스떡볶이 등
영향으로 인해 떡볶이가 점점 매워지다보니
이에 대한 불만 또한 적지않음
한국사람이라고 다 매운거 잘먹는게 아니거든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매운맛에 약해지는 것도 있고
그러다보니 젊어도 매운음식에 약한 부류들이나
중장년, 노년층들중엔 아 ㅅㅂ 존나 맵기만하고
옛날 떡볶이가 그립다 이런 반응도 강하다함
또한 지역적 편차도 크고 (서울과 영남의 차이처럼)
순한맛 떡볶이도 선보이고 있음
떡볶이 세계화 흐름속에
후발주자로 등장했지만
빠르게 떡볶이 시장에 안착
국대 떡볶이의 경우
국대란 말 자체가 국가대표의 줄임말로
한국 떡볶이 시장의 국가대표를 지향하는데
아무래도 떡볶이 세계화의 영향도 있는 걸로 보임
창업주 김상현 대표는 대구출신의 80년생으로
지금 메이저 브랜드 떡볶이 창업주들 중
가장 어린 걸로 알려져있으며
대구대 체대를 다니다 중퇴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라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국제경영학을 전공하며
군고구마 장사, 신발 장사, 호프집 서빙,
주류 배달업, 한인 음식점 배달업등을 섭렵했으며
한국에서 와서 의류업을 하다 실패했다함
어릴때부터 단골로 다니던
대구 한 떡볶이집 비법을 전수받아
2008년 12월 이대 앞에 태극기를 내걸고
무허가 노점을 열어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게 빵 터지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매출이 말 그대로 떡상함
그렇게 2009년 과감하게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국대떡볶이 1호점을 오픈함
처음엔 가로수길에 분식집이 먹힐까
회의적인 시각도 많았지만
오픈직후 월 매출 1000만원을 돌파하며
대중들에게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
2호 대치점, 3호 홍대점을 연달아 오픈함
분식 주 소비층인
10~30대 여성고객들을 겨냥
훈남 마케팅과 깔끔한 인테리어
국대떡볶이는 보다시피
초창기 입점부터 알 수 있듯이
분식의 주 소비층인
10~30대 여성들을 겨냥함
그래서 이대나 가로수길에 들어간건데
국대떡볶이의 경우 여심을 철저히 고려함
그래서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특히 직원 선발에 있어
여성고객들에게 호감을 주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알려짐
그래서 그런지 점주나 직원 다수가
2030 남성으로 알려짐
(김상현 대표말에 따르면 80여개 매장중
여성점주도 7~8명 정도 있다고함 딱 10%)
그래서 항간엔 꽃미남이나 훈남만
직원으로 채용한다 소문도 돌았지만
이에 대해 김상현 대표는 그건 아니고
2030 여성들을 타깃으로 했기때문에
젊은 남성 직원들을 고용한건 사실이다
다만 예의바르고 밝은 표정인 사람들
좀 더 중시한다 이렇게 밝힘
(밝은표정도 외모가 매우 중요함 ㅋㅋ)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ㅆㅅㅌㅊ로 먹힘
심지어 남성 고객들까지 다수 유입됨
근데 이건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게
여자들뿐만 아니라 같은 동성인 남성들까지도
똑같은 가성비에 옵션인 제품이라면
호감도가 떨어지는 외모보단
호감을 주는 외모인 남성이 판매하는 쪽에
좀더 몰리는 경향이 강한 편임
(물론 아무리 호감도가 떨어지는 외모라도
가성비가 좋으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지만)
그래서 남성복이나 의류매장에서도
남자직원을 뽑을 때 외모보고 뽑는다고 하는데
식품쪽은 그게 더 훨씬 심하다고 함
군부대앞 식당에서도 남자서빙알바 뽑을 때
용모단정을 볼 정도니까 ㅋㅋ 뭐 인간의 본능임
시대적 흐름에 선제대응
2012년 6월 당시 국대 떡볶이는
경제민주화란 거센 흐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본사와 가맹점 상생을 꾀한다며
물류비만 받고 가맹비를 없애버림
친서민형 브랜드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초창기엔 2030 여성을 타깃으로 했다면
점차 학생, 남성층, 중장년 노년층으로 겨냥함
그러다보니 언론 인터뷰나 방송 출연,
대중 강연 등을 자주하게되는데
대중친화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는거임
앞으로의 전망
사실 떡볶이 시장의 전망이 그리좋은건 아님
현재 브랜드 떡볶이들은
매장수를 갈수록 줄이고 있고
매출액이나 영업이익도 하락하고 있음
아무래도 시장이 포화상태고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그런 점도 있고
HMR (가정간편식) 시장이 커지는 와중에
대형 식품, 유통업체들이
냉동(즉석) 떡볶이에 뛰어들고 있어
그쪽 시장이 상당히 커지고 있는 상황임
(이건 피자나 만두나 다 똑같음)
그러다보니 현재 떡볶이 세계화를 내걸고
해외진출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2020년 우한 코로나가 터지면서
그것마저 녹록한 상황은 아님
아마 이번 계기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브랜드는 대거 정리되리라고 판단해봄
이번글을 통해 한국 떡볶이 산업의 역사와
그 성장과정, 2000년대이후 프랜차이즈 시대
이렇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짐
오늘도 역시나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다음엔 새로운 정보글로 찾아옴
7줄 요약
1 현대식 떡볶이의 시작은
2 1953년 신당동 마복림 할머니임
3 1970~90년대 본격적으로 대중화
4 2000년대 이후는 프랜차이즈 시대
5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하며
6 치열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경쟁 중
7 앞으론 소수정예만 살아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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